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대 로마 (문단 편집) === 건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7ffcd766d419f59909d3843f17af41b2.jpg|width=100%]]}}} || || '''[[로마|{{{#fbe673 로마}}}]]의 정치적, 문화적 심장부였던 [[포로 로마노|{{{#fbe673 포로 로마노}}}]]의 모습''' || 로마 건축물은 [[고대 그리스]]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였지만, 동시에 여러 변형도 가해졌다. 특징은 시원시원한 기둥과 크게 3가지로 분류되는 현상적인 order 등이 있으며, 신전 건축의 경우엔 전문가가 아니라면 차이점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작 남-서유럽의 구 로마 제국 영토에는 양식 변화와 재건축, 파괴 등으로 인하여 온전히 보존된 로마 건축이 생각보다 많지 않으며, 오히려 아나톨리아 반도, 현재의 터키 지역에 훨씬 남아 있는 편이다. 당시 건축물은 현대 기준으로 봐도 굉장한 크기와 화려함을 자랑하였으며, 동서 대분열 이후 중세시대 건축 양식이 크게 변화는 와중에도 부분적으로나마 양식은 계승되었고, 18-19세기 즈음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써 다시 부활하였다. 수많은 유럽 도시들이 로마 시대에 만들어졌다. 대개 군사 기지나 로마 이주민들이 세운 마을이었는데 군단병이 곧 시민이었던 로마 군제의 특성상, 식민지에 정착하는 로마인들은 현지인과 결혼한 로마 군인인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영국과 프랑스의 수도가 된 [[런던]](최초에는 론디니움이라는 이름이었다)과 [[파리(프랑스)|파리]](최초에는 루테티움이라는 이름이었다)도 로마가 건설하거나 도시화한 곳이다. 유럽 각지에다가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규모의 건물들을 짓고 다녔기 때문에, 당시 북방 민족들이 로마의 건축물을 보고 거인과 난쟁이에 대한 신화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에스파냐]]에는 로마 제국이 건설한 다리가 아직도 있다. 에스파냐 [[카스티야이레온]] 자치 지역 세고비아주의 주도 [[세고비아]]에 있다. 조금 풍화되긴 했어도 멀쩡하게 생겼다. '''심지어 지금까지 고쳐서 쓴다.''' 당장 버스나 기차 내려 시내 중심가 시야를 압도하는 크기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세고비아뿐만 아니라 스페인 전체의 [[랜드마크]]로 쓰인다. 로마 제국에는 40만 km에 달하는 도로([[로마 가도]])가 있었는데 그중 8만 km가 포장 도로였다. 비슷한 시기 중국 [[한나라]]에는 [[비포장도로]]만 3만 5천 km가 있었고, 포장도로는 전무했다. 로마의 [[콘크리트]]는 '포졸리나'라고 해서, 금이 가거나 훼손되면 그 부분에 규산칼슘이 생성돼서 틈이 메워지는 장점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천연 시멘트의 특성으로 기술 개발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기술은 동로마(비잔티움) 시대까지는 유지되었으나 동로마 멸망 이후로 실전되었다가[* 시멘트 자체는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1800년대에 인공 포촐란 [[시멘트]]로 복원되었다. 콘크리트의 원형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가장 먼저 개발하여 사용했으나, 콘크리트 건축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한 문명은 로마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X4GUOymrHvg)]}}} || 그리고 로마의 수로 기술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아프리카의 사막화가 로마의 관개 수로들 때문에 지연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그 유명한 [[사하라]]를 틀어막을 정도다. 물론 로마 이전에도 아직 북아프리카에는 숲이 남아 있었고, 로마도 그걸 물려받은 것이지만, 적극적인 수로 건설로 사하라의 북아프리카 확장을 엄청나게 늦추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역으로 밀어냈다. 이슬람 제국이 로마를 박살내면서 아프리카를 로마가 상실한 이후에도 사막 농업에 익숙했던 아랍 때문에 북아프리카는 번영을 누렸으나, 이후 아랍 세력 간의 싸움으로 북아프리카의 관개 시설이 박살나면서 급속히 사막화가 진행되었고, 지금 북아프리카는 죄다 사막이다. 이후로 수로 건설이 다시 시작된 것은 현대에 이르러 중동 지역이 [[오일달러]]를 이용해 국내 인프라 건설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 와중에 뜬금없이 [[대한민국]]이 [[리비아]] 지역의 수로 공사를 담당하게 되면서 로마의 위업을 계승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0214c89151ae646c5fc1317f3594deaf.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book.interpark.com/jpseo71_3758953910.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ablogabouthistory.com/1147270_68411634.jpg|width=100%]]}}} || 로마의 가도들에는 진짜로 틈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중세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돌을 빼갔음에도 아직도 상당히 외관이 그럴싸하다. 기나긴 세월을 거처 남은 돌덩이도 풍화되었을 터임에도 비교적 돌 도둑이 적었던 가도들은 옛날 모습이 '''지금 모습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꽤 멀쩡하게 생겼다. 대부분의 이탈리아의 간선 [[국도]]는 물론 예전 로마 제국 땅이던 곳 역시 로마의 가도에 [[아스팔트]]나 철도만 깔고 쓸 정도이다. 고대에도 그렇고 중세에도 '''숲만 가득했던''' 옛 갈리아, 게르마니아 지역에 로마는 '''도시'''를 건설했다. 로마에서 시민들에게 인정받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정복 성과를 내고 개선식의 영광을 받는 것인데, 이걸 위해 정복한 땅들은 죄다 숲만 가득한 미개척지였다. 하지만 로마는 거기다가 그냥 도시를 건설해 해결한다. 나무만 있던 많은 곳들을 지금의 도시로 바꿔놓는 기반을 로마가 만들었다. 로마가 저 땅들에 도시를 건설한 덕분에 중세로 이어지는 문명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물론 엄밀히 말해서 갈리아와 게르마니아를 도시화하고 개간지로 만든 것은 중세인들의 힘이다. 지중해권과는 달리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지방의 도시의 역할은 지역 거점의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로마인들이 건설한 도시의 영향력도 한정적이었다. 결국 갈리아나 게르마니아에서 로마의 유산인 대농장들은 로마가 쇠락하면서 이에 따라 쇠퇴하고, 그에 의존하던 로마의 도시도 쇠퇴를 면치 못했다. 중세 농업 체제의 발전은 북부 유럽에 걸맞는 농경 방식 도입과 발전, 지속적인 기술 개량,[* 전술했듯 로마 멸망 전에는 이런 농경 방식은 많이 한정적이었다.] 소규모 촌락 공동체에 의한 적극적인 숲 개간이 본질적인 이유였다. 로마의 과학적 수학적 성과도 괄목할 만한 건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즉 공학이나 실용성에서는 많은 발달이 있었지만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그리스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주장. 오히려 [[고대 그리스]]보다 순수 과학은 쇠퇴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예를 들면 [[계통분류학]]에서 동물학의 [[아리스토텔레스]], 식물학의 [[테오프라스토스]]라는 두 거장이 있었으나, 로마 제국의 [[대 플리니우스]]는 그저 이 둘을 베끼기에만 급급했다는 것이다. >로마인들의 근시안성으로 그들은 단면적이며 모방적인 이류의 문화를 낳았다. 수세기 동안 그들은 그리스인들에게 의존함으로써 영감과 독창적 사고의 결함을 보충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제국의 토지 측량을 착수할 때에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전문가들을 불러들였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달력을 개혁하고자 할 때, 알렉산드리아인을 초빙하였다. 수학, 과학, 다른 예술 분야에서 로마인들이 이룩한 업적이 정말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은, 추상적 사고가 실용주의에 의하여 추동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별 가치 없다고 비난하는 '실용적'인 사람들에게는 경종이 될 만한 본보기이다. >---- >모리스 클라인 <수학, 문명을 지배하다> 中 위 글은 추상적인 분야에서의 그리스의 업적이 뒷받침되어 가시적인 분야에서 로마의 업적이 나왔음을 얘기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